|
---리룩스서버컴퓨터 백업 |
文學위의 文學 출판사입니다. PDF로 전환하여 복사기로 책을 만듭니다. 자세한 내용은, '디지털 인쇄'에서 확인해 보세요! |
일기 (日記)
추석 명절에 즈음하여... (33) 제 20화.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각
2021.11.01 16:12
13. '가족 모두가 정신질환의 경력이 있는 건 아닐까?'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둘 째 아들부터 넷 째 아들까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에 비한다면 큰 아들만 멀쩡했는데 이유를 든다면,
"어머니 왜 저희들에게는 안 주시고 다른 아들에게 돈을 주세요?"
"너희들은 잘 살잖냐?"
"저희가 어디 나아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왜 다른 아주버니 들만 그렇게 도움을 주시는지요."
"너희 자식 낳고 크잖니... 똑같이 자식들에게 대하고 싶은 거지!"
"저희는 그러지 않잖아요! 똑 같지가 않고 차별하시는 게.."
"너도 자식들을 키워 봐라! 결혼 시키면 못 사는 자식이 있는 법이다. 그 애에게 유독 신경이 쓰이지 않겠니?"
이렇게 말씀 하시는 시어머니를 바라보면서 큰 며느리는 울컥하니 화가 남을 어쩌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해가 가기는 했다. 모두 세 명의 아들이 모자라서 못 산다고 보는 모친의 견해는 자식들의 처지를 비교해 보면 뻔히 알 수 있는 거였다. 그래서 큰 자식은 놔둬도 잘 컸고 돈 벌어오는 데 전혀 염려하지 않았었다.
"네가 보듯이 큰 아들은 봉급을 타면 모두 가져다 줬다. 그리고 용돈만 타 썼고, 헛 된 건 하지 않았으므로 결혼해서도 그런 몸에 배인 생활력을 그대로 유지했지만 다른 아이들을 그렇지 않았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월급 봉투를 가져 오지 않은 세 아들의 경우 자기들이 관리를 했는지 어디에 썼는지 결혼전에 내게 맡기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돈 관리가 못했다고 보는 게 내 생각이다. 결혼을 한 뒤에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을 테고... "
"어머니가 생각하시는 것만큼 우리도 잘 살지 못했고 여유롭게 생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처음 사업을 시작한 뒤부터 바늘 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리고 지금에서야 조금 형편이 나아진 건 사실이지만 저희들에게는 전혀 도와 주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면 사실 안중에도 없다는 것 밖에 더 있겠어요?"
"그래 내가 첫 아들은 염려하지 않았다. 젖을 먹이더라도 우는 아이에게 더 먹이지 않겠니... 그만큼 못 사는 자식이 눈에 더 밟히는 법이다. 너도 나중에 살아 봐라! 그게 당연하지!"
그녀가 이렇게 얘기하는 건 큰 며느리가 의문을 갖고 다른 자식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게 된 이유에 대하여 궁금증을 갖고 있어서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50세를 넘긴 자식들에 대하여 80세가 된 노모가 폐지를 줍고 공공근로에서 번 돈을 주기 위해서라고 그 이유를 말하였으므로 어이가 없었다.
"그럼, 엄마가 계속하여 폐지를 줍고 있는 게 두 자식들에게 용돈을 주기 위해서라는 거예요?"
"늬들은 잘 살으니 됐잖니... 그런데 그 애들은 못 살고... 계속 돈이 없다고 찾아와서 손을 내밀고 있으니... 나라도 그렇게 벌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폐지 줍는 게 행복하고..."
"이제 그만 쉬어야지, 언제까지 자식들 뒤치닥 거리를 하실 거예요? 이제 그만 두시고 저희들에게 와서 쉬면서 지내시는게..."
"아직 벌이를 그만 둘 생각은 없다. 일 없으니까. 그런 줄 알고..."
14. 여기서 큰 며느리가 생각하는 기준은 빗말과도 같았다. 왜냐하면 아직 때가 아니었는데 집을 장만해 놓지 못하여 기거할 곳이 마땅치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대 놓고 모셔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한 상황이다. 그녀의 집은 타올공장과 함께 붙어 있었다. 남편이 변두리에 땅을 마련하여 허름하게 공장과 집을 직접 짓고 사업을 한다고 근 30년을 중노동처럼 일만 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처럼 해서 겨우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보니 남들에게는 잘 살고 있다고 폼은 그렇다하게 재고 다녔지만 기실 실속은 없었던 셈이다. 그래서 시어머니조차 모셔올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나오는 사람들 막내 아들 (넷 째) : 최 영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