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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추석 명절에 즈음하여... 제 2막4절. 47. 묘 자리를 장만한 뒤
2021.12.22 20:37
제 2막 4장
47. 묘 자리에 대한 인식
나오는 사람들 어머니 (박) 분희(언연이) 큰 아들 : 최 영운 그의 아내 김 난희 그의 이웃 친구 장 석호 둘 째 아들 : 최 영달. 박창원: 최영달의 절친 죽마고우 최 중혁, 최 이혁, 최 삼혁, 최 사혁 세 째 아들 : 최 영진 막내 아들 (넷 째) : 최 영철 대학병원 신경과 의사 : 전 수지 아버지 최 삼용 |
부친에게 찾아 온 것은 그의 동생이다. 이부형제(異父兄弟)였다.
"형, 어머니가 돌아 가셨어!"
"아니, 언제?"
"어제 밤... 흑 장례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너, 돈 있냐? 나도 없어! 그럼, 어떻게 할까 거적에 싸서 갖다 보리는 수 밖에... 씨 팔, 시집 갔으면 잘 살아야지! 그래 가지고는 제 명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왜, 그렇게 억세게 재수는 없어 가지고... 병을 둘어서... 우리 처지에 병원비가 어딧다고 그 지랄이야 지랄이"
최 삼용운 아버지가 다른 남동생을 데리고 어머니가 죽었다는 집을 찾아 갔다.
그리곤 그날 거적에 싼 체 지게에 지고 돈두렁 밭두렁을 건너 산으로 향하는 두 사람. 그들은 바로 최 삼용과 이부형제인 배 정수였다. 하지만 둘은 잔뜩 술에 취한 상태였고 장례식도 치루지 않은 체 어머니를 의사에게 보여서 사망진단서만 띈 상태로 그 뒤 산으로 향한 것이다.
그렇지만 눈물이 앞을 가려서 그는 연신 욕지거를 늘어 놓는다. 어머니가 죽기 전에 한바탕 해대었을 법한 용어 쌍욕이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성질머리가 지랄 같하고 하던 모습을 떠 올렸다.
그들 두 사람은 그래도 죽이 잘 맞았다. 그래서 어머니가 있는 동생 집으로 갈 때는 돈이 떨어진 때였고 술을 사먹을 돈이 없으면 곧잘 찾아 갔었는데 시장에서 떡 장사를 하던 재혼한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반갑게 맞아 주던 게 셍각났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젖을 떼기도 전에 달아 나듯이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었다. 그러다보니 갓 난 아기였던 최 삼용은 어머니의 애정을 갖지도 못한 체 커야만 했고 그것이 고집스럽고 애정이 겹핍된 남자로 성장을 한 체, 비툴어진 성격의 알콜 중독자이자 무절재한 무능력자로 크게 된다. 이것이 똑같은 두 사람에게 전이 된 듯 그들은 서로 잘못된 길로 걷게 되었고 어머니를 함께 산에 매장하면서도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체 나중에 묘지를 찾지 못하여 그만 어머니 묘를 잃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알콜 중독자로서 자신의 한 몸도 돌보지 못하는 신세였다. 두 사람이 함께 형제로서 계속 유지하였다는 사실은 최 영운에게는 아무 기억이 없었다. 단지 어머니 박 분희가 하는 말,
"내가 그 동생이라는 사람을 보았지만 꼭 돈이 필요한 때만 나타나곤 했었다. 그래서 돈이 없어서 줄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관계도 흐지부지 하게 되고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된 것이지. 이제는 먼 얘기지만..." 그렇게 말 끝을 흐리곤 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자신들의 처지도 간수하지 못하면서 원만한 가족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불행한 점은 두 사람이 어머니의 묘지를 간수하지 못한 것이었고 그 뒤 찾지 못했으니...
최 영운이 어린 시절 모아왔던 아버지의 모습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늘 술에 취해 있었으므로 부자간에는 대화가 전혀 없었음은 물론이다.
"아버지 할머니 묘가 어디인 지 아세요?"
"씨팔, 몰라 새끼야!"
그러면서 때릴 기세였다.
"그만 두죠!"
최 삼용이 아들을 어려서부터 자주 주먹으로 때리던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크면서 그짓도 할 수 없어서 손만 올렸다 내리는 게 전부였다. 힘으로 이길수 없다는 럴 알고 난 뒤였다. 다만 주먹을 쥐고 허공에 한 들어 올린다 내리는 것으로 시늉만 할 뿐이었다. 중풍에 걸려서 오른 쪽 수족을 쓰지 못하고 말을 어눌하게 하면서도 늘 그랬다. 아무래도 묘 자리를 찾지 못 하는 게 틀림없다고 보게 된 것도 그 점 때문이었다.
"저 양반이 젊어서 동생과 묻었다는 묘지가 어디 있는지 모른는 게 확실하다니까! 그래서 무식이 탈로나고..."
무식이 그래도 탈로난다는 어머니의 말과 함께 명절 때만 되면 성묘를 동생들과 같이 다니던 기억 속에 할아버지의 묘지도 너무 멀어서 돌아서 다녀와야만 했고 그늘이 져서 잔듸가 살 수 없었던 그늘진 곳으로 공원이 되면서 옮겨야 되었으므로 언제나 묘 자리를 장만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 두게 된 최 여운은 그 생각을 45세 때야 비로서 실천을 하기에 이른다.
묘 자리는 어떤 의미를 주는가?
아버지가 묘 자리가 없어서 전북 임실의 <호국용사 묘지>에 안장을 하게 된 것도 사실은 묘 자리가 없어서였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