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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기 힘든 가난한 생활 중에... 어머니의 초상으로
2024.10.07 09:19
어떤 식으로든 살아 나가야만 했습니다. 그시절 그 때는... 젊은 시절의 하루하루는 힘겨운 노동에 청춘을 바쳐야만 했지요. 돈이 없는 가난한 집에서 4명의 아들 중에 장남으로 태어난 탓에 무능력하고 알콜 중독자였던 부친은 언제나 술에 만취되어 있었고 모친은 행상을 나가서 집집마다 순례를 하듯이 돌아다니면서, "고물 삽니다!" 을 외치고 다녔지요. 머리에는 다라를 이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강냉이 티밥과 세탁 비누가 몇 개 얹혀져서 고개를 눌렀답니다. 엄마가 올 때까지 고개가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어린 자식들...
313. 그렇게 가난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내가 철이 들던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그 전에는 가난한 줄 몰랐었고 부친이 왜 알콜중독자 생활을 하는지 모친이 행상을 나가다보니 머리에 이고 다니는 짐이 부거워 목이 비틀어 져서 늘 잘 쳐들지를 못하고 다니는 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모친이 커 나가는 자식들로 인해서 돈에 쪼들리고 사는 모습을 보면서 장남으로서 생활비를 벌어야만 한다는 은연 중의 깨달음은 어쩌면 당연했었다. 그래서 상업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실습을 나온다는 핑계로 집 근처의 봉제 공장을 다니기 시작하게 된다.
내가 그렇게 동생들과 가족을 위해서 모든 걸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건 모친이 여기저기 동네에서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였으리라! 그 중에 동네 유지중 하나인 시계포.금은방을 아줌마와 친하여 얼마든지 돈을 빌려 쓸 수 있었는데 그 조건이,
"언니, 자식들 중 하나만 우리에게 주면 안 돼요?"
돈을 많았지만 불행하게도 자식을 낳지 못하는 그 집은 늘 우리들 중 하나를 원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단호했다.
"어떻게 제 자식들을 다른 곳에 보낼 수 있어! 내가 비록 행상은 하고 있을 망정, 지금까지 이 고생을 하면서 키운 아이들을 그렇게 남을 준다는 건 절대로 허락할 수 없어! 미안해... 동생!"
"괜찮아요! 언니...제가 너무 언니네 애들이 부러워서 그런 소리를 했네요."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모친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스러워 했던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리고 직장을 구해서 돈을 벌어야만 했던 이유두 모친과 동생들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동생들은 내가 보호를 하여 그런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오늘날에도 내게 고마워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고생하면서 우릴 키웠는데 형이 그랬다고?"
"그래, 그 당시 내가 집 안에 가장이었고 너희들은 내 도움을 받고 가난을 모르고 살았던 거야!"
그렇게 은연 중에 내 비쳤지만 소용없었다.
"차라리 나처럼 가난에 찌들고 궁핍한 느낌을 받았다면 지금처럼 가난하게 살지 않았을텐데... 오히려 내 도움을 받고 큰 너희들에게 불찰을 했구나..."
이렇게 나 자신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인생은 늘 열심히 맡은 직업에 출실하여 여유를 갖지 못했었다. 64세인 지금은 그나마 다행인 것이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아 놓았고 그 재산이 다시 세를 받아서 조금씩이나마 부담을 덜어 주웠으므로 그다지 생활에는 쪼들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예전의 내가 쫒기듯 살아야만 했던 그 공장 생활로 인하여 동생들과 살았던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가끔 갖게 되는데 너무도 힘들었던 직장 생활에 대한 추억은 나름대로 내 인생을 더 풍족하게 만들었다는 게 지론이다.